2026-04-29

[유미작가의 간병 일기 우리들의 시간] 제6화. 진정한 웰다잉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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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정 엄마는 그동안 네 번의 암을 겪었다. 유방암으로 시작해서 신우암, 폐 전이암, 뇌 전이암까지 전신에 고루 암세포가 퍼졌다. 엄마의 고통스러운 암 투병 과정을 지켜보면서, 죽음이라는 개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죽음을 단순히 ‘사람이 살다가 숨을 멈추는 순간’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가 여러 차례 암 수술을 받고, 후유증으로 심한 섬망을 겪고, 결국 요양원 생활까지 하게 되는 과정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어쩌면 죽음은 마지막의 짧은 순간이 아닌, 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숨이 멈출 때까지의 과정을 통틀어 지칭하는지도 모른다. 결국 좋은 죽음은 마지막 순간의 평온함이 아니라, 그 긴 과정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채워갔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유미 간병일기 6화

엄마를 만나러 요양원에 가면, 치매에 걸린 할머니들이 접이식 의자에 앉아 만화영화가 나오는 텔레비전을 멍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중간중간 운동도 하고 인지 훈련도 하지만, 사실상 죽기 전까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개개인의 자유 의지가 끼어들 틈은 보이지 않았다.

어르신들은 정해진 계획표에 따라 움직이고 요양보호사의 지시에 따라 행동할 뿐. 그리고 바로 이것이 엄마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점이었다.

요양원에서는 밤에 잠이 안 와도 불을 못 켜게 했어. 책 좀 읽겠다고 해도 안 된대. 밤에 거실에 나오는 것도 안 되고, 텔레비전도 정해진 시간 외에는 켜면 안 돼. 라디오도 아주 작게 들어야 했어. 개인실이라서 방은 나 혼자 썼는데 말이야.

요양원에서는 개인행동이 철저히 제한되었다. 밤에 몇 시에 잠들었든 새벽 다섯 시에는 모두 일어나 체조를 해야 했다. 아침, 점심, 저녁 모두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해야 했고, 계획된 활동에는 반드시 참여해야 했다.

무엇보다 요양보호사의 허락과 도움 없이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바로 앞마당에 꽃을 구경하러 나가는 것도 금지되었다. 거실 통유리창 너머로 봄꽃이 만발했지만, 시설 이용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평생을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살아온 엄마는 이런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엄마가 요양원을 나와서 가장 많이 한 말이 바로 ‘하루를 살더라도 사는 것처럼 살고 싶다’라는 것이었다.

엄마가 말하는 ‘사는 것처럼’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존중을 받으면서 자유 의지대로 사는 것을 뜻했다.

엄마는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책을 조금 읽다가 산책하고, 저녁에는 원하는 메뉴로 단출하게 밥상을 차려 식사하고 싶어 했다. 거창하지 않은 기존의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 엄마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만약 엄마가 거동을 전혀 할 수 없어 이런 일들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보드라운 이불이라도 덮고 침대에 누워 있고 싶어 했다. 그러나 요양원에서는 침구를 자주 세탁해야 하기 때문에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유미 간병일기 6화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제 몸도 쇠약해졌고, 삶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아직도 원하는 게 많냐

라고 하거나,

요양원의 규칙적인 생활이 신체와 인지 기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니 감수하라

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평생 새처럼 자유롭게 살아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모든 선택권을 박탈당한다면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쉬울까? 그리고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사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방식을 존중받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일까?

EBS 다큐멘터리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를 보면, 일본의 한 요양원에서 90대 노인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허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떤 이에게는 충격적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오히려 그 장면이 깊이 와닿았다. 만약 앞으로 건강이 좋아질 가능성이 높은 젊은 환자라면 이런 행위는 제지해야 마땅하지만, 이미 삶의 막바지에 들어선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소 위험해 보일지라도 삶의 방식을 존중해 주는 것이 좋은 죽음, 즉 웰다잉에 더 가깝지 않을까?

우리 사회는 웰다잉에 대해 말한다. 인터넷에서 ‘웰다잉’을 검색해 보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며 평안하게 삶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죽음을 미리 준비하여 아름다운 마무리를 추구하는 문화”이며, “핵심 구성 요소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유언장 작성, 호스피스 이용” 등이라고 나온다.

물론 이런 준비도 중요하다. 하지만 웰다잉의 핵심은 그보다 더 본질적인 면에 있다고 본다. 진정한 웰다잉은 바로 그 시기, 즉 기존의 일상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 시점부터 숨이 멎는 시점까지의 시간을 최대한 자신답게 살다가 마무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실현하려면, 가장 중요한 건 돌봄 인식 개선일 것이다. 현재의 노인 돌봄은 안전 관리와 생명 연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요양원에서 본 어르신들은 지금껏 살아온 삶의 방식이나 개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삶의 마지막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지워지고 정해진 틀 속에서 효율적인 집단생활이 이뤄지고 있었다. 치매 노인들이라 뭘 모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도 각각 취향과 개성과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려면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환자는 많고 돌봄 인력은 적은 상황에서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끝자락에 선 모든 사람이 각자 고유한 삶을 살아왔고, 이들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면, 최소한의 존엄성과 선택권은 존중되어야 하지 않을까?

누구나 늙고 병들어 돌봄이 필요한 시기가 온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이 병상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살다가 삶의 마지막을 맞게 된다. 모두가 가야 할 길이기에, 우리는 그 과정을 어떻게 하면 잘 보낼 수 있을지를 더 깊이 고민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미리 제도를 보완하고 사회적 인식을 전환하는 것 또한 노후 준비의 일부일 것이다.

유미 간병일기 6화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버티며 살아왔다. 세상이 알아주는 화려한 성취가 없었더라도, 스스로는 안다. 지금까지 충분히 애써왔다는 것을, 그리고 매일을 버티며 살아온 것 자체가 이미 대단한 일이었다는 것을.

그동안의 고단했던 삶을 존중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사람만의 삶의 방식이 이어질 수 있도록 곁에서 배려해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마음에 그릴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좋은 죽음’이 아닐까.

》 유미 작가의 ‘간병 일기, 우리들의 시간’ 시리즈 연재가 종료되었습니다. 함께해 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about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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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

프리랜서 작가, 편집자, 번역가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프리랜서 작가 겸 편집자 겸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현재 유미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창문 넘어 도망친 엄마>를 집필했다.

※ 이 칼럼의 내용은 필진 개인의 의견이며, 교보생명 뉴스룸의 공식 입장이나 방향성과는 무관합니다.

[유미작가의 간병 일기 우리들의 시간] 제6화. 진정한 웰다잉이란 친정 엄마는 그동안 네 번의 암을 겪었다. 유방암으로 시작해서 신우암, 폐 전이암, 뇌 전이암까지 전신에 고루 암세포가 퍼졌다. 엄마의 고통스러운 암 투병 과정을 지켜보면서, 죽음이라는 개념을 조금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예전에는 죽음을 단순히 ‘사람이 살다가 숨을 멈추는 순간’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엄마가 여러 차례 암 수술을 받고, 후유증으로 심한 섬망을 겪고, 결국 요양원 생활까지 하게 되는 과정을 보며 생각이 바뀌었다. 어쩌면 죽음은 마지막의 짧은 순간이 아닌, 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인지하는 순간부터 숨이 멈출 때까지의 과정을 통틀어 지칭하는지도 모른다. 결국 좋은 죽음은 마지막 순간의 평온함이 아니라, 그 긴 과정을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채워갔는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엄마를 만나러 요양원에 가면, 치매에 걸린 할머니들이 접이식 의자에 앉아 만화영화가 나오는 텔레비전을 멍한 눈으로 보고 있었다. 중간중간 운동도 하고 인지 훈련도 하지만, 사실상 죽기 전까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뿐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개개인의 자유 의지가 끼어들 틈은 보이지 않았다. 어르신들은 정해진 계획표에 따라 움직이고 요양보호사의 지시에 따라 행동할 뿐. 그리고 바로 이것이 엄마에게 가장 견디기 힘든 점이었다. 요양원에서는 밤에 잠이 안 와도 불을 못 켜게 했어. 책 좀 읽겠다고 해도 안 된대. 밤에 거실에 나오는 것도 안 되고, 텔레비전도 정해진 시간 외에는 켜면 안 돼. 라디오도 아주 작게 들어야 했어. 개인실이라서 방은 나 혼자 썼는데 말이야. 요양원에서는 개인행동이 철저히 제한되었다. 밤에 몇 시에 잠들었든 새벽 다섯 시에는 모두 일어나 체조를 해야 했다. 아침, 점심, 저녁 모두 정해진 시간에 식사를 해야 했고, 계획된 활동에는 반드시 참여해야 했다. 무엇보다 요양보호사의 허락과 도움 없이는 아무 데도 갈 수 없었다. 바로 앞마당에 꽃을 구경하러 나가는 것도 금지되었다. 거실 통유리창 너머로 봄꽃이 만발했지만, 시설 이용자들에게는 그림의 떡이었다. 평생을 독립적이고 자유롭게 살아온 엄마는 이런 생활에 적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엄마가 요양원을 나와서 가장 많이 한 말이 바로 ‘하루를 살더라도 사는 것처럼 살고 싶다’라는 것이었다. 엄마가 말하는 ‘사는 것처럼’은 최소한의 인간적인 존중을 받으면서 자유 의지대로 사는 것을 뜻했다. 엄마는 아침에 일어나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책을 조금 읽다가 산책하고, 저녁에는 원하는 메뉴로 단출하게 밥상을 차려 식사하고 싶어 했다. 거창하지 않은 기존의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 엄마의 유일한 소망이었다. 만약 엄마가 거동을 전혀 할 수 없어 이런 일들이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보드라운 이불이라도 덮고 침대에 누워 있고 싶어 했다. 그러나 요양원에서는 침구를 자주 세탁해야 하기 때문에 이마저도 허락되지 않았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이제 몸도 쇠약해졌고, 삶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왜 이렇게 아직도 원하는 게 많냐 라고 하거나, 요양원의 규칙적인 생활이 신체와 인지 기능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으니 감수하라 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평생 새처럼 자유롭게 살아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모든 선택권을 박탈당한다면 그 상황을 받아들이는 것이 과연 쉬울까? 그리고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조금이라도 더 오래 사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이 원하는 방식을 존중받고 그에 따라 사는 것일까? EBS 다큐멘터리 <내 마지막 집은 어디인가>를 보면, 일본의 한 요양원에서 90대 노인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허용하는 장면이 나온다. 어떤 이에게는 충격적이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오히려 그 장면이 깊이 와닿았다. 만약 앞으로 건강이 좋아질 가능성이 높은 젊은 환자라면 이런 행위는 제지해야 마땅하지만, 이미 삶의 막바지에 들어선 사람에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다소 위험해 보일지라도 삶의 방식을 존중해 주는 것이 좋은 죽음, 즉 웰다잉에 더 가깝지 않을까? 우리 사회는 웰다잉에 대해 말한다. 인터넷에서 ‘웰다잉’을 검색해 보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며 평안하게 삶을 마무리하는 것으로, 죽음을 미리 준비하여 아름다운 마무리를 추구하는 문화”이며, “핵심 구성 요소는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 유언장 작성, 호스피스 이용” 등이라고 나온다. 물론 이런 준비도 중요하다. 하지만 웰다잉의 핵심은 그보다 더 본질적인 면에 있다고 본다. 진정한 웰다잉은 바로 그 시기, 즉 기존의 일상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 시점부터 숨이 멎는 시점까지의 시간을 최대한 자신답게 살다가 마무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를 실현하려면, 가장 중요한 건 돌봄 인식 개선일 것이다. 현재의 노인 돌봄은 안전 관리와 생명 연장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요양원에서 본 어르신들은 지금껏 살아온 삶의 방식이나 개성과는 전혀 상관없이 삶의 마지막을 향해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개인은 지워지고 정해진 틀 속에서 효율적인 집단생활이 이뤄지고 있었다. 치매 노인들이라 뭘 모른다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들도 각각 취향과 개성과 성격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하려면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를 것이다. 환자는 많고 돌봄 인력은 적은 상황에서 효율성을 추구하는 것은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삶의 끝자락에 선 모든 사람이 각자 고유한 삶을 살아왔고, 이들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면, 최소한의 존엄성과 선택권은 존중되어야 하지 않을까? 누구나 늙고 병들어 돌봄이 필요한 시기가 온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이 병상에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살다가 삶의 마지막을 맞게 된다. 모두가 가야 할 길이기에, 우리는 그 과정을 어떻게 하면 잘 보낼 수 있을지를 더 깊이 고민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 대비해 미리 제도를 보완하고 사회적 인식을 전환하는 것 또한 노후 준비의 일부일 것이다.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방식으로 버티며 살아왔다. 세상이 알아주는 화려한 성취가 없었더라도, 스스로는 안다. 지금까지 충분히 애써왔다는 것을, 그리고 매일을 버티며 살아온 것 자체가 이미 대단한 일이었다는 것을. 그동안의 고단했던 삶을 존중하고, 마지막 순간까지 그 사람만의 삶의 방식이 이어질 수 있도록 곁에서 배려해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마음에 그릴 수 있는 가장 따뜻한 ‘좋은 죽음’이 아닐까. 》 유미 작가의 ‘간병 일기, 우리들의 시간’ 시리즈 연재가 종료되었습니다. 함께해 주신 독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aboutAUTHOR유미프리랜서 작가, 편집자, 번역가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프리랜서 작가 겸 편집자 겸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현재 유미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창문 넘어 도망친 엄마>를 집필했다.※ 이 칼럼의 내용은 필진 개인의 의견이며, 교보생명 뉴스룸의 공식 입장이나 방향성과는 무관합니다. 유미 작가의 간병 일기 우리들의 시간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