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12-06

[유미 작가의 간병 일기 우리들의 시간] 제1화. 암을 네 번 겪고 살아난 오 여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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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 환자 중 스스로 암에 걸릴 줄 알았던 사람은 얼마나 될까? 게다가 한 번도 아니고 네 번씩이나 걸릴 줄 알았던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 엄마 오미실 여사는, 바로 암에 네 번 걸렸던 암 환자다.첫 번째 암은 2009년이었다.

유미야, 엄마 다음 달에 혼자 2주 동안 여행 가려고. 생각할 게 있어서 연락은 안 받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갑작스레 혼자 여행을 간다고 선포한 엄마였다. 그런데 엄마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내게 밥하는 법과 빨래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통장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패물을 어디 숨겼는지 알려줬다. ‘엄마가 왜 이러지? 여행 가는 거지, 어디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엄마가 여행을 떠난 당일 저녁,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유미야, 병원으로 와. 엄마 병원에 있어.


왜? 엄마 사고 났어?


너희 엄마 여행 간다고 거짓말하고 암 수술받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택시를 타고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엄마는 병실에 누워 있었다.

Kyobo 필진 유미

엄마, 어떻게 된 거야?

엄마는 유방암 2기라고 했다. 가슴 한쪽을 절제하고 암이 전이된 림프절도 떼어냈다고 했다. 왜 암 발병 사실을 알리지 않은 걸까?

왜긴 왜야. 너희들 걱정할까 봐 그랬지. 어차피 걱정해 봐야 바뀌는 것도 없는데 뭐 하러 여러 사람 걱정시켜.

엄마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암 환자가 저렇게 의연하게 행동하다니, 참 대단하다 싶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엄마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었다. 오십 대 중반에 벌써 암 환자가 된 우리 엄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지만 웬걸, 엄마는 암 발병 이전보다 훨씬 활기차게 살았다. 집순이였던 사람이 쉬지 않고 밖에 나가기 시작했다, 합창반에서 활동하며 합창 대회에 나갔고, 문화센터에서 매주 영어 회화 수업을 들었다. 매일 저녁 아빠와 뒷산에 오르고 주말마다 전국의 산을 누볐다. 웃음치료를 받으면서는 집에서도 끊임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암에 걸린 후 더 알차고 활기차게 사는 엄마를 보며, 암 발병이 완전히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엄마는 66세가 되었고, 그동안 암은 재발하지 않았다. 곧 완치 판정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변에 피가 섞여 나왔다. 서둘러 방문한 병원에서 신우암 3기 진단을 받았다. CT 사진을 보니 7cm가 넘는 암이 신장 아래쪽에 붙어 있었다. 어쩌자고 이렇게 암이 커질 때까지 몰랐을까? 그렇게 열심히 식단 조절하고 운동도 했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엄마는 덤덤해하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 나 유방암도 이겨낸 사람이야. 수술받고 항암치료 하면 돼. 뭐가 걱정이니? 엄마 안 죽어.

엄마는 수술실에 씩씩하게 들어가 신장 하나를 절제했고, 이어지는 항암치료를 잘 견뎠다. 그러고는 이전보다도 더 활발히 활동했다. 매일 걷기 모임과 뜨개질 모임에 참여하고, 바리스타 자격증 강좌, 라인 댄스, 영어 수업에 출석하느라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엄마,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영어 수업은 왜 이렇게 열심히 들어?


나 산티아고 순례길 혼자 여행가는 게 꿈이잖아. 나 69세 되는 해에 꼭 갈 거야. 두고 봐.

엄마의 상태를 보니,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 같았다.

Kyobo 필진 유미

그러다 2년 후, 암은 폐로 전이되었다. 세 번째 암 발병이었다. 절망할 법도 한데, 엄마는 이번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까짓 거 또 수술해서 떼어내면 된다’고 했다.

신장이랑 폐는 두 개씩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니? 다른 부위에 생긴 것보다 나아. 폐 하나 떼어내도 아무 문제없어. 걱정하지 마.

엄마는 폐 수술을 받았고, 독한 항암치료가 이어졌다. 건강할 때 54kg이었던 몸무게는 39kg이 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깡마른 몸에, 체력도 많이 떨어졌다. 그러나 엄마는 휘청대는 몸을 이끌고 여전히 많은 외부 활동을 소화하며 지냈다. 멈추는 법을 잊은 고장 난 태엽 인형 같았다.

1년 후, 엄마 나이 69세에 네 번째 암이 발병했다. 이번에는 뇌였다. 암이 뇌로 전이되면 예후가 나쁘다며, 이제 마지막을 준비하라고들 조심스레 말했다. 세 번의 암에도 의연히 맞섰지만, 결국 엄마는 여기까지인 걸까? 절망감에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막상 엄마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뇌에 자리잡은 암세포 때문에 치매 환자처럼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 다시 암 투병을 시작했다.

뇌 수술에 이어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엄마의 몸무게는 28kg으로 줄어 있었다. 정신도, 신체도 온전치 못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심한 섬망 증상 때문에 요양원에서 케어를 받았다.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열흘 넘게 의식을 찾지 못하기도 했다. 홀로 산티아고로 여행을 떠나기로 한 해, 엄마는 힘든 싸움에서 항복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가족 모두 모두 말은 안 해도 ‘이제 여기까지인가 보다’ 하고 체념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포기했던 시점에도, 엄마는 굴하지 않았다. 엄마는 기적처럼 회복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여기가 한국인지 미국인지도 구분 못 하다가 조금씩 정신을 되찾았다. 숟가락 들 힘도 없어 옆에서 음식을 먹여줘야 했는데, 언젠가부터 혼자 숟가락을 들고 식사하기 시작했다.

요양보호사들이 낮과 밤 24시간을 교대로 보살피다가 어느 날부터는 요양보호사가 하루에 세 시간 정도만 돌봐 주면 될 정도로 나아졌다.

Kyobo 필진 유미

그리고 2년 후 2025년, 71세가 된 엄마는 이전처럼 힘찬 일상을 살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1~2만 보씩 걷고, 노인회관에서 훌라를 배우고, 요리를 배우고, 스마트폰과 난타 수업을 듣는다. 그리고 영어 수업은 이전보다 더욱 열심히 참여한다.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드디어 내년 가을에 떠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젊은 시절 꿈이었던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다. 얼마 전에는 지역에서 주최한 에세이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암 자체는 불행이 맞다. 하지만 이겨내면 삶에 어떤 선물을 가져오기도 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암에 걸리면 마치 삶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곤 한다. 나도 그랬다. 엄마가 암에 걸리고 재발할 때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엄마는 모두가 체념했던 시점에도 긍정적으로 삶을 이어갔다.

지금도 엄마 침대 머리맡에는 이렇게 쓰인 메모가 붙어 있다.

살아나리라.

그리고 엄마는 그 말 그대로 살아났다.

서울대병원 연구팀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암환자의 생존률은 환자의 마음 상태에 따라 5배 가까이 차이 날 수 있다”고 한다. “위기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삶의 방향을 주체적으로 재정비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사망 위험이 약 5배나 적다”는 것이다. 마치 엄마 이야기 같다. 엄마는 네 번의 위기에도 주저앉아 울지 않았다. “암 그까짓거” 하며 꿋꿋이 이겨냈다. 이것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삶에 암이라는 예기치 못한 불행이 찾아왔을 때, 의연히 이겨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기쁜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 같다.

앞으로의 글에서는 암 투병 가족을 간병하며 한 생각들, 요양시설을 이용하며 느낀 감정들, 암 치료를 위해 함께했던 일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내린 결정들과 가족 간에 끈끈한 힘으로 이겨냈던 힘든 시간 등 우리의 투병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드리려 한다.

지금도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암 환우와 가족들이 희망을 갖고 암을 치료해 나가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길 소망한다.

about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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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 미

프리랜서 작가, 편집자, 번역가

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프리랜서 작가 겸 편집자 겸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
현재 유미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창문 넘어 도망친 엄마>를 집필했다.

※ 이 칼럼의 내용은 필진 개인의 의견이며, 교보생명 뉴스룸의 공식 입장이나 방향성과는 무관합니다.

암 환자 중 스스로 암에 걸릴 줄 알았던 사람은 얼마나 될까? 게다가 한 번도 아니고 네 번씩이나 걸릴 줄 알았던 사람은 얼마나 될까? 우리 엄마 오미실 여사는, 바로 암에 네 번 걸렸던 암 환자다.첫 번째 암은 2009년이었다. 유미야, 엄마 다음 달에 혼자 2주 동안 여행 가려고. 생각할 게 있어서 연락은 안 받을 거니까 그렇게 알아. 갑작스레 혼자 여행을 간다고 선포한 엄마였다. 그런데 엄마의 행동이 조금 이상했다. 내게 밥하는 법과 빨래하는 법을 가르쳐주고, 통장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패물을 어디 숨겼는지 알려줬다. ‘엄마가 왜 이러지? 여행 가는 거지, 어디 죽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마침내 엄마가 여행을 떠난 당일 저녁, 아빠에게서 전화가 왔다. 유미야, 병원으로 와. 엄마 병원에 있어. 왜? 엄마 사고 났어? 너희 엄마 여행 간다고 거짓말하고 암 수술받았다. 이게 무슨 소리인가. 택시를 타고 정신없이 병원으로 달려갔을 때, 엄마는 병실에 누워 있었다. 엄마, 어떻게 된 거야? 엄마는 유방암 2기라고 했다. 가슴 한쪽을 절제하고 암이 전이된 림프절도 떼어냈다고 했다. 왜 암 발병 사실을 알리지 않은 걸까? 왜긴 왜야. 너희들 걱정할까 봐 그랬지. 어차피 걱정해 봐야 바뀌는 것도 없는데 뭐 하러 여러 사람 걱정시켜. 엄마는 태연한 표정이었다. 암 환자가 저렇게 의연하게 행동하다니, 참 대단하다 싶었다. 그러나 그보다는 엄마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었다. 오십 대 중반에 벌써 암 환자가 된 우리 엄마.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하지만 웬걸, 엄마는 암 발병 이전보다 훨씬 활기차게 살았다. 집순이였던 사람이 쉬지 않고 밖에 나가기 시작했다, 합창반에서 활동하며 합창 대회에 나갔고, 문화센터에서 매주 영어 회화 수업을 들었다. 매일 저녁 아빠와 뒷산에 오르고 주말마다 전국의 산을 누볐다. 웃음치료를 받으면서는 집에서도 끊임없이 웃음을 터뜨렸다. 암에 걸린 후 더 알차고 활기차게 사는 엄마를 보며, 암 발병이 완전히 나쁜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10년이 지났다. 엄마는 66세가 되었고, 그동안 암은 재발하지 않았다. 곧 완치 판정을 앞두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변에 피가 섞여 나왔다. 서둘러 방문한 병원에서 신우암 3기 진단을 받았다. CT 사진을 보니 7cm가 넘는 암이 신장 아래쪽에 붙어 있었다. 어쩌자고 이렇게 암이 커질 때까지 몰랐을까? 그렇게 열심히 식단 조절하고 운동도 했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엄마는 덤덤해하며, 오히려 나를 위로했다. 걱정하지 마. 나 유방암도 이겨낸 사람이야. 수술받고 항암치료 하면 돼. 뭐가 걱정이니? 엄마 안 죽어. 엄마는 수술실에 씩씩하게 들어가 신장 하나를 절제했고, 이어지는 항암치료를 잘 견뎠다. 그러고는 이전보다도 더 활발히 활동했다. 매일 걷기 모임과 뜨개질 모임에 참여하고, 바리스타 자격증 강좌, 라인 댄스, 영어 수업에 출석하느라 집에 붙어 있는 날이 없을 정도였다. 엄마, 다른 건 그렇다 쳐도 영어 수업은 왜 이렇게 열심히 들어? 나 산티아고 순례길 혼자 여행가는 게 꿈이잖아. 나 69세 되는 해에 꼭 갈 거야. 두고 봐. 엄마의 상태를 보니, 불가능한 일만은 아닐 것 같았다. 그러다 2년 후, 암은 폐로 전이되었다. 세 번째 암 발병이었다. 절망할 법도 한데, 엄마는 이번에도 아무렇지 않았다. ‘까짓 거 또 수술해서 떼어내면 된다’고 했다. 신장이랑 폐는 두 개씩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니? 다른 부위에 생긴 것보다 나아. 폐 하나 떼어내도 아무 문제없어. 걱정하지 마. 엄마는 폐 수술을 받았고, 독한 항암치료가 이어졌다. 건강할 때 54kg이었던 몸무게는 39kg이 되어 있었다. 누가 봐도 깡마른 몸에, 체력도 많이 떨어졌다. 그러나 엄마는 휘청대는 몸을 이끌고 여전히 많은 외부 활동을 소화하며 지냈다. 멈추는 법을 잊은 고장 난 태엽 인형 같았다. 1년 후, 엄마 나이 69세에 네 번째 암이 발병했다. 이번에는 뇌였다. 암이 뇌로 전이되면 예후가 나쁘다며, 이제 마지막을 준비하라고들 조심스레 말했다. 세 번의 암에도 의연히 맞섰지만, 결국 엄마는 여기까지인 걸까? 절망감에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막상 엄마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뇌에 자리잡은 암세포 때문에 치매 환자처럼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엄마는 온전치 않은 정신으로 다시 암 투병을 시작했다. 뇌 수술에 이어 항암치료를 받는 동안 엄마의 몸무게는 28kg으로 줄어 있었다. 정신도, 신체도 온전치 못했다. 대소변을 가리지 못하고 심한 섬망 증상 때문에 요양원에서 케어를 받았다. 항암치료 후유증으로 열흘 넘게 의식을 찾지 못하기도 했다. 홀로 산티아고로 여행을 떠나기로 한 해, 엄마는 힘든 싸움에서 항복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가족 모두 모두 말은 안 해도 ‘이제 여기까지인가 보다’ 하고 체념하고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포기했던 시점에도, 엄마는 굴하지 않았다. 엄마는 기적처럼 회복하기 시작했다.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여기가 한국인지 미국인지도 구분 못 하다가 조금씩 정신을 되찾았다. 숟가락 들 힘도 없어 옆에서 음식을 먹여줘야 했는데, 언젠가부터 혼자 숟가락을 들고 식사하기 시작했다. 요양보호사들이 낮과 밤 24시간을 교대로 보살피다가 어느 날부터는 요양보호사가 하루에 세 시간 정도만 돌봐 주면 될 정도로 나아졌다. 그리고 2년 후 2025년, 71세가 된 엄마는 이전처럼 힘찬 일상을 살고 있다. 일주일에 두 번 1~2만 보씩 걷고, 노인회관에서 훌라를 배우고, 요리를 배우고, 스마트폰과 난타 수업을 듣는다. 그리고 영어 수업은 이전보다 더욱 열심히 참여한다. 산티아고 순례길 여행을 드디어 내년 가을에 떠나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젊은 시절 꿈이었던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글쓰기를 시작했다. 얼마 전에는 지역에서 주최한 에세이 공모전에서 최우수상을 받았다. 암 자체는 불행이 맞다. 하지만 이겨내면 삶에 어떤 선물을 가져오기도 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이 암에 걸리면 마치 삶이 끝난 것처럼 생각하곤 한다. 나도 그랬다. 엄마가 암에 걸리고 재발할 때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엄마는 모두가 체념했던 시점에도 긍정적으로 삶을 이어갔다. 지금도 엄마 침대 머리맡에는 이렇게 쓰인 메모가 붙어 있다. 살아나리라. 그리고 엄마는 그 말 그대로 살아났다. 서울대병원 연구팀이 발표한 논문에 따르면, “암환자의 생존률은 환자의 마음 상태에 따라 5배 가까이 차이 날 수 있다”고 한다. “위기 상황에서 감정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삶의 방향을 주체적으로 재정비하는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사망 위험이 약 5배나 적다”는 것이다. 마치 엄마 이야기 같다. 엄마는 네 번의 위기에도 주저앉아 울지 않았다. “암 그까짓거” 하며 꿋꿋이 이겨냈다. 이것이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삶에 암이라는 예기치 못한 불행이 찾아왔을 때, 의연히 이겨내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기쁜 일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 같다. 앞으로의 글에서는 암 투병 가족을 간병하며 한 생각들, 요양시설을 이용하며 느낀 감정들, 암 치료를 위해 함께했던 일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내린 결정들과 가족 간에 끈끈한 힘으로 이겨냈던 힘든 시간 등 우리의 투병 이야기를 조금씩 들려드리려 한다. 지금도 고통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는 암 환우와 가족들이 희망을 갖고 암을 치료해 나가는 데 작은 힘이나마 보탤 수 있길 소망한다. aboutAUTHOR유 미프리랜서 작가, 편집자, 번역가성균관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프리랜서 작가 겸 편집자 겸 번역가로 일하고 있다.현재 유미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창문 넘어 도망친 엄마>를 집필했다.※ 이 칼럼의 내용은 필진 개인의 의견이며, 교보생명 뉴스룸의 공식 입장이나 방향성과는 무관합니다. 유미 작가의 간병 일기 우리들의 시간 시리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