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그동안 암 진단을 네 번 받았다. 55세에는 유방암, 66세에는 신우암, 68세에는 폐 전이암, 69세에는 뇌 전이암이었다. 그중 앞 세 번의 암 투병 때는 엄마를 간병할 일이 별로 없었다. 워낙 엄마가 기초 체력이 좋기도 했고, 독립적인 성격이라 수술 직후를 제외하곤 누가 엄마를 돌봐주기를 원치 않았다. 항암 치료를 받을 때도 시골에서 직접 운전해서 서울에 있는 병원에 혼자 다녔다. 엄마는 그동안 세 번에 걸친 전신마취 수술을 받았지만, 늘 정신이 멀쩡했다. 덕분에 나는 엄마의 암 투병 때마다 마음이 힘들긴 했어도, 간병 때문에 몸이 힘들지는 않았다.
그러나 엄마의 네 번째 암 투병은 달랐다. 뇌 전이 암은 이전에 겪은 암과 전혀 달랐다. 엄마는 이제 스스로를 돌볼 수 없었다. 암 때문에 뇌가 많이 부은 탓인지 환각과 환청을 겪었고, 편마비 증상 때문에 거동이 불편했다. 밤새 잠을 자지 않고 알 수 없는 말을 끝도 없이 쏟아냈다. 이번에는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했다. 네 번째 암 발병에, 정신마저 온전치 않은 엄마를 보며 나는 가슴이 많이 아팠다.

‘엄마가 이렇게 아플 때까지 내가 너무 무심했나?’ 하는 죄책감이 들었다. 이번만큼은 내 몸이 부서져도 좋으니, 최선을 다해 엄마를 돌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간병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엄마에 대한 사랑은 넘쳤지만, 나는 너무나 서툴렀다. 응급실에서 엄마를 부축해 이동할 때는 수액 걸이를 잘못 당겨 팔에서 주삿바늘이 뽑히고 말았다. 피가 솟구쳐 나와 바닥에 피가 흥건히 고였고, 나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랐다. 다행히 간호사 선생님이 달려와 상황은 해결되었지만, ‘왜 이렇게 부주의해서 가뜩이나 아픈 엄마를 더 아프게 만들었나’ 하며 나 자신을 계속 탓했다.

용변을 받아내는 일도 어려웠다. 소변은 소변줄을 채워 해결했지만, 대변은 그럴 수가 없었다. 엄마는 환자용 이동식 변기에는 대변을 보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거동이 불편한 엄마를 부축해 화장실에 가는 건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민하던 내게 간호사 선생님이 ‘기저귀를 채우라’고 조언했다. 아기를 키우는 입장이라 기저귀 가는 일이야 쉬웠다. 하지만 성인의, 그것도 엄마의 기저귀를 간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나 별 수 없었다. 나는 매점에서 특대형 기저귀를 사와 엄마에게 채워 드리고, 용변을 처리했다. 여러 번 해도 익숙해지지 않아 매번 긴장되어 실수를 했다.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날 때면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내가 어렸을 때 기저귀를 수천 번씩 갈아줬을 텐데, 나는 왜 이렇게 불효 자식처럼 굴까?’
엄마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
더불어, 엄마는 요구가 많았다. 춥다고 해서 담요를 덮어주면 금방 덥다고 했고, 담요를 벗겨 주면 또 금세 춥다고 했다. 병실에 있는 걸 워낙 답답해하는 엄마는 자주 밖에 나가길 원했다. 침대에 누워 있는 엄마를 일으켜 세워 휠체어에 태우고 옥상에 나가면, 10분도 되지 않아 춥다고 병실로 돌아가자고 했다. 병실로 돌아온 후 침대로 옮겨 눕히면, 다시 5분도 안 되어 답답하다고 밖에 나가자고 했다. 하루 종일 수십 번씩 엄마를 휠체어에 앉혀 옥상에 올라갔다 내려와서 침대로 옮기고를 반복하니 몸도 너무 힘들고 짜증이 쌓여 폭발할 지경이었다.
어느 날은 검사 때문에 물도 마시지 말고 금식을 해야 했다. 엄마는 배가 고프다면서 자꾸 먹을 걸 달라고 졸랐고, 내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같은 병실 사람들에게 음식을 달라고 계속 졸라댔다. 내가 음식은 절대 금지라고 하자, 급기야는 화를 내며 ‘그럼 내가 직접 매점에 가서 커피랑 빵을 사 먹는다’고 하며 침대에서 혼자 내려오다가 크게 넘어질 뻔했다. 그동안 꾹꾹 눌러놨던 화가 기어이 터지고야 말았다.
대체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하지 말라는 걸 왜 자꾸 한다는 거야!
그리고 좀 누워 있지 왜 자꾸 움직이고 싶어 해! 힘들어 죽겠어 진짜!
엄마에게 짜증을 내고 병실을 나와 버렸다. 그리고 곧 후회했다. 정작 가장 힘들고 고생하는 건 엄마인데 왜 나는 이것밖에 안 되지? 엄마를 사랑한다면서, 게다가 앞으로 얼마나 더 사실지 모르는데 나는 왜 이렇게 화를 내고 있지? 나는 피로와 더불어 죄책감으로 몸과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마음이 약해지자, 나는 다른 가족을 원망하기 시작했다. 바로 친오빠였다. 엄마가 암으로 입원했을 때 오빠와 나는 둘 다 직업이 있었다. 하지만 재택근무를 하는 내가 오빠보다 시간 여유가 있어 자연히 내가 엄마를 주로 돌보게 되었다. 엄마의 병원 진료 때는 보통 내가 함께했고, 그밖에 간병인을 구하거나 병원 진료나 검사를 챙기는 것도 나였다. 오빠도 참여했지만, 엄마의 병원 일을 챙기는 것은 대부분 내 일이었다.
그러는 동안 내 업무는 뒷전이 되었다. 이 간병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기약이 없었고, 나는 그동안 애쓰며 쌓아온 커리어가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억울했다. 아들이나 딸이나 똑같은 자식인데, 왜 딸인 나만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까? 이런 원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져 밤에는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간병은 이래서 힘든 거였다. 간병은 단순히 아픈 누군가를 돕는 일이 아니다. 환자의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움직이며 수발을 들고, 하면 안 되는 행동을 막는 등 신체적으로 지치는 일이다. 게다가 자신의 일상을 포기하고, 그동안 쌓아온 소중한 것들을 희생하고, 앞으로 있을지도 모르는 좋은 기회들을 놓치면서 삶을 희생하는 일이다. 또한 경제적·감정적으로도 힘들다. 직업적인 면을 희생하고, 간병하는 사람의 배우자와 자녀는 뒷전이 된다. 형제간의 우애도 금이 간다. 이게 간병의 힘든 점인 것 같다.
하지만 유독 나만 이럴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 부모 간병을 맞이했거나 이미 간병을 하고 있는 자녀들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진다. 자신의 삶과 자유를 중시하고, 사회적 성공과 안정을 추구하는 삶을 살다 어느 순간 모든 기회를 포기하고 병실에 갇혀 가족을 돌보는 일이 과연 쉬울까? 사랑만으로는 개인이 온전히 짊어지기엔 버거운 과제다. 아무리 낳아주고 사랑으로 키워주신 부모님이라도, ‘돌봄’은 현실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있다.
이 문제는 결코 개인에게만 주어진 시련이 아니다. 전 세계적인 흐름 속에서 대한민국 역시 2025년 기준 65세 이상 고령 인구가 25%를 넘어가는 초고령사회에 진입했다. ‘간병 파산’이라는 말이 뉴스에 오르내릴 만큼 간병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는 사회 문제로 떠올랐다. 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많은 자녀들이 커리어를 포기하고 직접 간병을 전담하거나, 그럴 수 없는 상황이라면 고액의 비용을 감수하며 개인 간병인을 고용해야 하는 현실에 놓여 있다.
간병시민연대가 2021년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개인 간병인을 고용한 응답자의 63%가 하루에 10만 원 이상을 지불했다고 답했다. 또 간병을 경험한 응답자의 96%는 간병비에 경제적 부담을 느낀다고 답했다. 최근 정부가 이 문제의 시급함을 인식하고 간병비 부담을 완화하기 위한 간병비 급여화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한 것이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갈 길은 여전히 멀다.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간병을 위해서는 비용뿐만 아니라 인력, 제도, 환경 전반에 걸친 체계적인 뒷받침이 필요하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이 문제가 하루 아침에 해결되기는 어렵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직접 겪어보기 전엔 간병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아프신 부모님을 나 몰라라 할 수도 없으니, 참 어려운 문제다. 앞으로 우리의 부모 간병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게 될까? 구조적인 변화도 시급한 것은 물론, 개인 차원에서의 준비 또한 더 이 이상 미뤄서는 안될 과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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